신학하는 삶 오이공감

왜 고통에 대해 물어야 하는가?

인간의 고난 앞에 아파하지 않는 신과 종교들과 사람들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나의 믿음은 부족하기만 하지만 그나마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을 향하여 걸어가는 여정에서 잉태되었다. 행복한 사람들, 지식으로 가득 찬 사람들, 명예로운 사람들은 고통의 여정에 동반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상처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주님을 받아들인 토마스 사도는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 16). 말하면서 고통의 십자가 여정을 따랐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 확고한 믿음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견디어내었을 때에만 가능한 길이다. 우리의 삶은 고통과 함께하는 여정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도전은 고난이라고 할 수 있다.

 

갈릴래아 바다에서의 폭풍(아버지 브뤼겔, 1596년경, 유화, 타이센-보르네미스자 미술관, 마드리드, 스페인)

상처받은 인간에게 침묵하시는 하느님께 대답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우리 모두의 질문이다. 예수께서 가신 길도 십자가 수난의 길이었다. 고통의 여정을 넘어서 우리는 하느님과 조우할 수 있다. 그 여정에서 상처받고, 부수어지고 절망의 강을 건너야 한다. 십자가의 밤을 지나지 않고 어둠을 체험하지 않은 신앙은 고난받는 사람들을 안아 줄 수 없다. 바리사이처럼 자신의 신앙을 확신하는 고난 받지 않은 신앙은 사변적 논리와 이데올로기와 일방적 가르침, 독선으로 신앙을 강요할 것이다.

 

예수는 고난받는 모든 사람을 예수 자신이라고 가르치셨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 그러므로 세상에서 고난받은 사람들의 모든 아픔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이다. 세상의 처참한 고통의 현장을 외면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인간의 속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힘이 들더라도 세상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고난받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가르침의 핵심이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순간에 하느님을 찾고, 침묵하시는 하느님께 분노하고 절망하여 결국에는 하느님을 떠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 부재의 어두운 밤을 지독하게 체험하지 않고는 신앙이 추구하는 사랑에 관한 의미를 알 수 없다. 성숙한 신앙은 하느님의 침묵을 통한 어두운 밤의 체험을 자기 스스로 극복함으로써 얻어진다. 나 자신도 침묵으로 숨어 계신 하느님 부재의 느낌에 휩싸일 때가 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어두운 밤을 인내하고 건너가야 한다. 신앙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시련을 통하여 성숙으로 이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기다리는 시간을 요구하신다.

우리의 소망을 기도드리면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시는 주술적 하느님을 갈망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도 있다. 신앙의 무대 뒤에 숨어서 하느님께 세속적 갈망을 투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거래하는 것이다. 세상의 불의나 이웃의 고난과 상처에 거의 관심이 없는 것이 보통 사람의 모습이다. 우리의 시선은 대부분 나 자신을 향해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상처와 세상의 불의를 외면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수난받고 죽을 때까지 가난하고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셨다. 예수는 공생활을 통하여 그들의 병을 치유하시고 연민으로 그들을 위로하셨다. 예수는 고난의 순간에 우리와 함께하셨다. 복음은 예수와 고통받는 이들이 함께 하는 모습을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다.

세상에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모두 악과 고통을 회피할 수 없다. 그들을 신앙의 유 무로 단순하게 선악의 이분법으로 구분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신앙인이지만 비신앙적으로 살 수 있고 반대로 비신자이지만 신앙적인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기적이고 연민이 없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고 아름다운 영혼을 보유한 무신론자도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우리가 삶의 바다를 나가기 전에 던져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2022.5.5. 김영수 루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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