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하는 삶

“하라고 할 때 해라!” 1. (총 3부 글) 조화수 바오로

나는 1988년 8월 서울 은평구 불광동 성당에서 바오로로 세례를 받았다. 1974년 11월 아내 릿따와 대구 삼덕동성당에서 관면혼배를 받을 때 약속을 14년만에야 지킨 늦깎이 신자였다. 그리고 1994년 10월 불광동 성당에서 견진을 받았다.

 

사실, 나는 아내와 만나기 전 감리교 신자였다. 1964년 고교 1년 시절 YMCA 동아리 활동을 시작하면서, 대구 제일감리교회에서 제법 열심히 영어 성경 및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였다. 그 후 1967년 대학생이 된 후 혜화동 대학로에 위치한 혜명감리교회에 나가 나름대로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그러던 중 1969년 대학 3학년 때 덜컥 청년회 회장으로 피선되자, 당시 담임목사께서 청년회장은 당회(우리의 사목회) 멤버가 되며, 반드시 세례교인이어야 한다기에 별 준비도 없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는 ROTC 장교로 임관, 최전방 생활을 하면서 사실상 종교 생활과는 멀어 졌다. 1973년 6월 전역 후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아내와 선보고 1년 정도 교제하다가 1974년 11월 결혼 하려고 하니 관면혼배를 받아야 한다기에 할 수 없이(?) 받고는 14년 만에야 약속을 지킨 셈이다.

 

그러고도 7년 여 동안의 홍콩 및 캐나다 토론토 주재원생활을 포함하여 1999년 중국 천진 한인성당 총회장을 맡을 때까지도 그냥 발바닥신자 수준에 불과한 신앙생활의 연속 이었다. 천진 공동체는 주임신부이신 예수회 소속 이 인주 베드로 신부님과 함께 약 300여명의 신자들이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직장관계로 중국 천진지점 지점장으로 부임해서 얼마 되지 않아 사목총회장으로 봉사해 달라고 신부님께서 요청하셨을 때, 너무나 준비도 없이 중책을 수행하기에는 크나큰 부담으로 다가와 며칠간 시간을 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그때까지는 좀처럼 아내와 상의하지 않아 왔던 나였지만 이 문제만큼은 아내의 의견을 구했다. 그랬더니 아내는 대뜸 “여보, 하라고 할 때 해라!”고 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바로 총회장직을 수락하고, 2002년 상해로 전근할 때까지 4년여의 시간동안 좌충우돌 신나게(?) 봉사하게 되었다. 그렇다! 참으로 오묘했다. 무엇에 홀린 듯이 하라고 할 때 해라!”는 아내의 말 한마디에 그대로 따랐으니……. 그리하여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의 신앙의 길잡이이신 이 인주 베드로 신부님과 더불어 그 당시 회장단과 만남을 지속하고 있는 소중한 인연이 되었으니 말이다.

 

2003년 귀국 후 2004년 12월 만 55세로 정년퇴직을 하면서 나의 신앙생활은 좀 더 깊어지게 되었으니, 이 또한 매 고비마다 하라고 할 때 해라!”가 약효(?)를 발했다. 정년퇴직 후 별로 잘 나지도 않은 나에게 꽤나 달콤한 몇 가지 재취업 오퍼가 있어 아내와 상의하면, “당신 그 동안 33년여 열심히 직장생활 했으니 이제 교회 봉사를 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언하곤 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주변에서는 당연히 그런 좋은 재취업 기회를 살려서 해야지 무슨 봉사 활동이냐며 강력하게 말리는 분위기가 팽배 하였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나는 용기 있게 아내의 제언을 기꺼이 받아들여 2005년 2월 혜화동 소재 가톨릭교리신학원 교리신학과 2년 주간 과정에 입학하여 2007년 2월 졸업, 선교사 및 교리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다. 그리 젊지 않은 나이에 쉽지 않은 학교생활이었지만 공부가 재미있기도 하고 얼마나 가슴 뜨거워지고 풍요로움을 만끽한 나날이었던지! 그 기간 중에 본당인 연신내성당에서 교리교사로 약 4년, 곧이어 사목회 기획분과장, 부회장 등으로 약 7년 정도 봉사하기도 했다.

 

(하라고 할 때 해라!” 2부 글이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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